제 735 호 [책으로 세상 읽기]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아마추어 수영 대회에 나가겠다고 다짐하면서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표지 (출처: https://www.yes24.com/Product/Goods/3239082) 주로 에세이 책에는 이렇게 잘 사는 나, 이렇게 멋진 나, 이렇게 똑똑한 나 등 자신을 뽐내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에세이 책 자체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는 나 자신에 취해있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역시 달리는 나 자신에 취해있는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달리는 이야기에 대한 책이지 건강법에 대한 책은 아니다. 나는 여기서 “자, 모두 함께 매일 달리기를 해서 건강해집시다”와 같은 주장을 떠벌리고 싶은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라는 인간에게 있어 계속 달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하고 생각하거나 자문자답하고 있을 뿐이다. - 서론 중 그러나 내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책이었다. 달리고 있는 자신을 뽐내며 독자를 붙잡고 한 번 달려보는 건 어떠냐는 식의 내용이 아니라, 달리고 있는 자신의 인생을 담백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업 작가로 일하게 되면서 체력을 기르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가 어느새 마라토너에 도전하고, 점차 나이 들어가면서 젊었을 때의 마라톤 기록을 깨기 어려워지자,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건강을 위해 시작했다지만 시간이 흐르며 달리기 자체에 몰입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보며, 나도 저렇게 몰입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여러 가지 형태의 여러 가지 구름.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져 간다. 그렇지만 하늘은 어디까지나 하늘 그대로 있다. 구름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그것은 스쳐 지나서 사라져 갈 뿐이다. 그리고 하늘만이 남는다. 하늘이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체인 동시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넓고 아득한 그릇이 존재하는 모습을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본론 중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관한 부분을 읽으면서는 재작년에 매일 1시간씩 걸었던 게 생각났다. 화가 나고 슬플 때마다 걸으면서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랬던 거 같아서 공감됐다. 국가대표와 같은 프로 운동선수가 되지 않더라도 대회를 목표로 운동을 즐길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도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주 종목을 마라톤에서 철인 3종으로 바꾸게 되는 대목에서는 마음이 아팠지만,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수영 연습을 해나가는 무라카미 모습을 보며 대단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생각 중, 책을 덮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아마추어 수영선수 대회를 나가고 싶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나에게 달리기와 같은 존재인 수영이 생각났고, 다시 수영을 시작해서 최종적으로는 아마추어 수영 대회에 나가고 싶어졌다. 운동을 배워본 적은 있어도 대회를 준비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서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고, 중학교 2학년 때 태권도를 그만둔 이후로는 꾸준히 운동을 해본 적도 없고 무엇보다 어릴 때 수영을 배우고 다 까먹어서, 지금은 한 팔 접영까지밖에 못하는 상태지만, 그럼에도 무작정 아마추어 수영 대회를 목표로 수영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 담긴 어떠한 에너지가 나에게 영향을 끼친 것만 같았다. 책을 읽고 한 달이 지난 지금. 아직도 내가 정말로 아마추어 수영 대회에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영을 다시 시작하고 싶고, 다시 시작할 것이고, 그 목표는 아마추어 수영 대회란 것만은 확실하다. 그 정도면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지연 수습기자
제 735 호 [순간포착] 유채꽃과 함께한 봄날의 마지막
유채꽃과 함께한 봄날의 마지막 지난 5월에 반포한강공원 서래섬에서 유채꽃 축제가 진행되었다. 다들 길을 걸으며 봄에 화사하게 핀 유채꽃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유채꽃은 밝은 노란색을 띠는 꽃으로, 따뜻한 느낌을 준다. 유채꽃의 꽃말은 활력과 기쁨, 낙관과 긍정을 상징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상명대 학우들도 다가온 여름을 맞이하며 행복한 일들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정소영 편집장
제 735 호 [교수칼럼] 자화상을 '쓰는' 자기성찰의 시간
자화상을 ‘쓰는’ 자기성찰의 시간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볼 때가 있다. 가장 친숙하고도 어딘지 낯선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자아성찰(自我省察)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 반성하고 살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거울 속의 모습이 사실 뒤집힌 상(象)이듯, 자신을 온전히 ‘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루에 세 번씩 스스로를 살피고 돌아보라는 ‘삼성오신(三省吾身)’의 고사가 있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자신을 대면하는 일은 힘들고 두렵기 마련이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나,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지금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서 있는지, 나의 진실한 마음과 소망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한 유효한 방식이 ‘자화상 시 쓰기’다. 17~18세기 서구에서 근대의 도래와 함께 본격적 자화상이 대두되었는데, 자화상은 근대적 주체를 찾고 표현하기 위한 매우 효과적인 도구였다. 본래 회화의 양식이나, 18세기 이후 문자를 활용한 하나의 글쓰기 형태로서 자기를 표출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우리 문학에서도 식민지기에 많은 자화상 시편들이 나타난다. 거울 등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근대인의 ‘자화상적 응시’가 나타나 있는 시들이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이들에게 근대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1930년대 이후 나타난 일련의 자화상 시편들 중 서정주, 윤동주, 노천명, 이상의 <자화상> 시편을 읽어보면 새로운 근대적 주체로서 세계를 해석하려는 노력이 드러난다. 특히 윤동주의 자화상 시편이 주목되는데, 그 시편들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과 자기수양, 좀 더 고양된 자신을 지향하는 승화와 초월의 상승 의지가 우물을 들여다보거나 하늘과 별을 우러러보고, 거울을 닦는 등의 자기 성찰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물론 화가처럼 스스로를 그려보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그림을 그리듯 자화상 시를 써보라는 제안을 하고 싶다.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을 찾고, 스스로에 대해 설명하고, 묘사하며 다른 것에 비유하는 문장을 여러 개 만들어 이것을 재료로 해서 시를 써보자. 그리고 자기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나 주변의 인물, 사물들로까지 서서히 시선을 넓혀보는 것이다. 시는 잘 짜인 기승전결의 내러티브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흩어진 기억과 감정, 스스로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의 속마음을 담아내기 좋다. 정순진(2014)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거나 존재 의의를 발견하고자 할 때 시를 쓰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은유는 인간과 세계 간의 상호작용, 관계를 이해하고 감정이입 하는 데서 생겨나므로 은유를 사용하면 숨겨진 가치와 의미를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자화상 시 쓰기’를 통해 자기 표현력도 기르고 세상에 대한 통찰력도 높일 수 있다.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는 것도 괜찮다. 문학적으로 완성된, 잘 쓴 시일 필요도 없다. 사실 우리나라 입시 현실에서 대학생들은 경쟁적 풍토와 과열된 입시 위주 교육으로 인해 자신을 돌아보고 이해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 채 대학에 오게 되곤 한다. 그러니 대학시절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충분히 생각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삶의 의미와 나아갈 방향을 찾는 일은 자기 외에 누구도 할 수 없다.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시점이다. 곧 방학이 시작될 텐데, 이번 방학에는 오랜만에 고요히 앉아 자기 자신과 나누는 나직한 대화처럼, 자화상 시 한 편 써보는 것은 어떨까. 잊고 있었거나, 자기도 모르던 자신의 부서진 조각이 발견되어, 스스로를 새롭게 다시 만들어갈 작은 시작이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제 734 호 “무상(無常)과 초심(初心)”
“무상(無常)과 초심(初心)” 초심(初心)은 처음으로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말한다. 학교는 3월에 개강하여 중간고사를 치르고, 다시 기말을 향하여 가는 중이다. 상명대학교 구성원들은 올해 혹은 한 학기를 시작하면서 품었던 생각을 얼마나 잘 지켜나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계획과 성취는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인생살이는 무상(無常)하다고 하지 않던가. 고려시대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은 공민왕(恭愍王, 재위 : 1351-1374) 시절 조정에 잠시 머물렀다가 은둔으로 삶을 마무리한 사람이다. 지금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의 ‘둔촌’은 이집의 호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 사람의 삶은 굴곡의 연속이었다. 이집은 신돈(辛旽, ?-1371)의 위세가 왕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대중들 앞에서 신돈의 잘못한 점을 말한 적이 있었다. 이 일로 그는 신돈의 박해를 피해 경상북도 영천에서 4년간 숨어 지내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그의 삶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원령(元齡)이었는데, 영천에서의 힘겨운 생활을 마친 뒤, 이름을 집(集)으로 자(字)는 호연(浩然)으로 바꾸고 호(號)를 둔촌(遁村)으로 정한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경세제민(經世濟民 : 세상을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구제한다)’이라는 사대부의 포부를 실행하면서 품었던 ‘의(義)로움’과 ‘도리(道理)’를 지켜나가기 위해서였다. 그의 자(字)는 ‘호연(浩然)’인데,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호연(浩然)’이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의(義)로움’과 ‘도리(道理)’에 맞는 행동이 꾸준히 쌓여서 생겨난다. 그의 이름인 ‘집(集 : 모으다)’은 ‘의로움을 모으다[집의(集義)]’에서 취한 것이다. 즉 이집은 앞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도 일관성 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생각에서 이름과 자(字)를 바꾼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보면 처음 가졌던 생각을 온전히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새삼 깨닫게 한다. 우리는 각종 매체를 통해서 ‘산 정상에 올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사방이 확 트인 산의 정상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좋은 공간이자, 앞으로의 삶을 조망하는 기회를 주는 곳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초심(初心)’에 대하여 한 번 정도 회상하며, 살아오는 과정에서 경험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모든 감정을 느낄 것이다. 5월은 녹음(綠陰)이 짙어가고 자연은 강한 생명의 기운을 내뿜는 시절이다. 이러한 자연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취(醉)해 보는 것도 하나의 낭만(浪漫)이라고 생각한다. 낭만을 즐기라고 말하고 싶지만, 때로는 한 번의 각성(覺醒)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초심(初心), 즉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지키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일이니까.
제 734 호 [책으로 세상 읽기] 삶에 대한 세상을 그리다, 책 <깊이에의 강요>
[책으로 세상 읽기] 삶에 대한 세상을 그리다, 책 <깊이에의 강요> ▲ 깊이에의 강요 책 표지(출처:https://www.yes24.com/Product/Goods/94111162) 깊이에의 강요는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 「문학의 건망증」 4가지 단편 문학이 함께 실려있는 책이다. 상황에 따라 너무 쉽게 변하는 견해 「깊이에의 강요」에서는 자기 작품에 깊이가 없다는 말을 듣고 고뇌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예술가, 그녀의 작품에 깊이가 없다는 평론을 한 평론가가 등장한다. 평론가는 예술가가 죽고 난 후 그녀의 그림에 삶을 깊게 파헤칠 수 있는 열정이 있다는 글을 쓰며 자신의 견해를 한순간에 바꾼다. 이 작품에서는 일관성 없는 평론가와 그의 말에 자신감을 잃고 죽음을 택한 예술가를 보며 모순과 웃지 못할 희극을 느낄 수 있다. 현대인들을 간접적으로 묘사한 삶의 축소판 「승부」에서는 현대인들의 삶을 반영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삶과 사회의 규칙을 곧이곧대로 준수하며 전전긍긍하는 늙은 체스 고수 장,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젊은 도전자, 삶에서 무엇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용기 있게 도전할 힘도 없는 구경꾼들. 이 인물들을 둘러싸고 이뤄지는 체스를 통해 각자의 약점이 드러나며, 한 층 더 성장할 수 있는 현실적인 우리의 삶을 반영한 작품이다.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케 하는 현실 묘사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고단한 삶을 통해 내면의 독창성과 감수성을 상실해 가는 인간을 생명력은 있지만 무감각하고 딱딱한 돌조개로 묘사한다. 주인공 뮈사르는 삶의 비밀을 알아버린 대가로 사회에서 축출당하고 남들보다 더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한다. 위의 3가지 단편소설은 언뜻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세 편의 이야기는 삶과 인간이라는 공통적인 주제에 이야기하며 독자들이 이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문학의 근본적인 문제점 「문학의 건망증」에서는 이 책의 저자 쥐스킨트가 문학 작품은 우리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에 대해 고민한다. 우리가 무엇을 읽는다면 그 내용이 다 잊혀서 삶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지 아니면 무의식 속에 남아있어 삶에 면면히 영향을 미치는지 고민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박리브 수습기자
제 734 호 [영화로 세상보기]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의 힘, 영화 <원더>
[영화로 세상보기]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의 힘, 영화 <원더> ▲영화 원더 포스터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원더’는 주인공 ‘어기 풀먼’과 그의 주변인들이 저마다의 사랑으로 서로를 보듬으며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해 나가는 따뜻한 이야기이다. 어기는 선천적 안면 기형으로 인해 27번의 성형수술을 겪었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외모를 가지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보면 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어기는 얼굴을 헬멧으로 가리고 다닌다. 이런 아들의 행동을 알면서도 부모님은 교육을 위해 어기를 학교에 보내기로 한다. 예상대로 초반에는 모두가 어기를 피했다. 그러나 어기는 다른 친구들의 놀림으로 상처를 받고 학교를 관두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학교생활에 임하며 이겨내는 것을 택했다. 그런 어기의 내면을 알아본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갔고 그들은 진정한 친구가 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기이지만 그의 주변인들의 시점에서도 이야기가 진행된다. 어기와 처음 친구가 된 ‘잭 윌’의 시점이 나타났다. 잭은 교장 선생님의 부탁으로 어기와 어울리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의무감에서 시작한 친구 놀이에 불과했지만 점차 어기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제일 좋아하는 친구를 꼽으라고 한다면 어기를 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원래 같이 다니던 친구는 어기의 외모를 놀리며 괴롭히는 친구였고, 그 친구의 비위를 맞춰주다 그만 본심에는 없었지만 어기에게 상처가 될 말을 하고 말았다. 그 후로 잠시 사이가 틀어졌지만, 계속해서 어기에게 옳지 않은 언행을 일삼는 친구와 다툼을 벌이게 되면서 다시 어기와 친구가 된다. 우정이라는 사랑의 형태를 통해, 어기는 자신의 외모를 보고 꺼려 하는 사람들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고 진정한 친구를 얻게 되었다. 한편, 어기의 누나, ‘비아 풀먼’의 시점도 나온다. 동생은 남들과는 다른 외모로 태어나 차별과 괴롭힘을 당하기 쉬웠고, 그렇다 보니 부모님의 관심도 동생에게 쏠리기 마련이었다. 동생과 부모님을 사랑했던 비아는 이런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서운할 수 있는 일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힘듦을 토로할 곳이 필요했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미란다’는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 그러나, 비아의 가족을 보면서 가족끼리의 유대감이 부러웠던 미란다는 부러움, 질투를 느끼고 그녀를 피한다. 영문도 모르고 고민을 나눌 수 있던 친구를 잃게 된 비아는 연극 동아리에서 ‘저스틴’을 만나게 된다. 저스틴은 심적으로 힘들어하던 비아의 곁에서 위로를 건네주며 결국 연인으로 발전했고, 비아의 가족들 속에서도 잘 어울리며 비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 이런 저스틴의 모습을 본 미란다도 자신을 반성하고 진심으로 비아를 응원하는 친구가 된다. 저마다 몰래 간직하고 있는 상처가 타인과의 관계 속 오고 간 따뜻한 대화와 행동으로 치유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다. 꼭 연인과의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더라도 친구와의 우정, 가족 간의 사랑,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인류애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사랑은 우리의 생각보다 강력한 힘을 지녔다. 사랑에서 나오는 상대에 대한 존중, 배려, 공감, 지지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상대방의 상처를 치유하고 상대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든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도 사랑을 나눠주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사랑으로 다른 이를 보듬으면 그 영향력은 나비효과처럼 퍼져나가게 되지 않을까? 우리 모두 이런 사랑의 힘을 퍼뜨리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바이다. 이시영 수습기자
제 734 호 [만평] 뭐 입지
김다엘 부장기자
제 733 호 [개교기념 축사] 총장
학교 법인 상명학원 설립 87주년 및 상명대학교 개교 59주년 기념 축사 사랑하는 상명 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해로 우리 상명학원이 설립 87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학내 전 구성원과 졸업생 그리고 우리 학원과 직접·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모든 분과 함께 뜻깊은 날을 축하하고자 합니다. 변화하는 시대 환경 속에서 우리 학원도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 하루는 편안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달려온 우리의 지난 노고를 서로 칭찬하며 서로 위로하는 따뜻한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상명을 사랑하고 아껴주시는 여러분들과 함께 다시 한번 상명학원 설립 87주년을 축하합니다. 지금부터 87년 전 설립자께서 세검정 언덕 위에서 처음 교육의 뜻을 펼친 이후, 우리 학원은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 왔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교양 있는 시민을 양성한다는 기본적인 목표에 충실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어울리는 새로운 인재상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현재까지 우리는 자랑스러운 상명의 이름을 지켜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이런 노력을 가능하게 했던 동력은 학내외 구성원들이 보여준 상명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인공지능이나 자동 시스템이 사람의 일을 대신하게 된 현실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현실이 기술이 모든 일을 해결해 줄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세상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사회는 복잡해지겠지만 상명에 대한 우리 구성원들의 관심과 애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설립 기념일은 축하의 날임과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어제 하던 일을 오늘 그대로 반복한다면 내일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에 큰 성취를 이루었다고 그것이 내일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또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현재의 교육환경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강요하는 변화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우리의 역량에 맞는 새로운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미래의 발전을 위한 옳은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우리가 무엇을 해 왔는지를 돌아보는 한편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교직원은 수준 높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잠시 성찰하여 주십시오. 학생들은 자기를 어떻게 성장시킬지 고민해 주십시오. 졸업생들은 후배들과 모교에 더 큰 관심을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구성원 모두 서로에게 좋은 동료가 되어 주십시오. 상명에 인연을 맺은 우리는 서로에게 모두 든든한 우군이 되어야 합니다. 내부가 견고하면 외부의 압력에 더욱 단단해지지만, 내부가 허약하면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서집니다. 구성원들이 현재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때 우리는 강해질 수 있습니다. 5월은 참으로 아름다운 달입니다. 4월에 힘겹게 터져 나온 신록은 5월을 맞아 절정의 아름다움을 맞이합니다. 여린 연두색도 어두운 진초록도 아닌 아름다운 초록빛을 뽐냅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엄혹한 시대에 피어나 전쟁과 개발 시대를 견딘 우리 학원은 지금 5월의 초록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5월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재에 안주하고 말고 매일 새로워진다는 마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지속될 때 ‘진리’, ‘정의’, ‘사랑’이라는 창학 정신과 교육 이념이 아름답게 빛나는 자랑스러운 상명의 이름을 오랫동안 떨칠 수 있습니다. 올해 설립 기념일은 저를 비롯한 모든 상명 구성원이 재도약을 위한 각오를 새롭게 하는 그런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그동안 우리 상명학원의 발전과 인재 양성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신 상명가족 여러분, 그리고 동문회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학교 발전을 위해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보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며 축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5월 16일 상명대학교 총장 홍성태
제 733 호 [개교기념 축사] 총동문회장
재학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졸업을 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해마다 5월이 되면 모교를 생각합니다. 아마도 개교기념일이 있어서 그런 듯합니다. 늘 이즈음 축제를 했고 신록이 우거진 캠퍼스 곳곳에 이목을 끄는 행사들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팬데믹이 끝나고 비로소 북적거리게 된 모습을 보니 오래 전 그날들이 떠오릅니다. 특히 올해는 개교 59주년이라 더 의미가 각별합니다. 곧 60주년을 앞두고 있어서 이래저래 동문회에서도 미리 기획할 일들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제 동기들인 84학번은 1965년생이라 모교와 동갑내기인 셈입니다. 상명대학교의 60년이 우리들의 60년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긴 세월을 잘 겪어낸 상명의 59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최근 언론에서 자주 접하는 뉴스들을 보면 출산율 하락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대학 입학정원에 대한 감축으로 이어질 테고 대학 운영이 생존 경쟁을 하듯 치열해진 것도 현실입니다. 하지만 경쟁은 언제나 우리 옆에 딱 붙어서 있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 자기의 역할을 찾기 위해 끊임 없이 경쟁해 온 졸업생들의 모습을 봐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경쟁으로부터 자유롭고 편한 시절은 없었고,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또한 대학이 모든 것을 보장해 주지 않듯이 전공을 살려 사회에 나가 대기업에 줄을 지어 들어가는 것만이 꿈꿔야 할 미래는 아닌 듯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빠르고 눈부시게 변해 왔는지 제가 살아온 60년은 수세기 동안의 변화를 단 1세기 만에 모두 바꿔 놓았습니다. 예전에는 달나라를 가는 것이 세계 토픽이라면 지금은 우주로 관광을 떠나고 모바일폰으로 세상의 네트웍을 손 안에서 주무르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운전을 하던 시절에서 내비게이션으로 온 세상을 어디든 다 찾아갈 수 있습니다. 팬데믹 때 대면활동이 줄어 들면서 발달한 키오스크 문화와 로봇이 서빙하는 식당의 확대, 종이 발권 없이 큐알코드로만 패스하는 곳곳의 현장들은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 한 오늘의 모습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달라질지, 그 흐름에 우리 상명인들도 한 몫을 단단히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학문으로 배우던 모든 것들이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 한 모든 일들이 눈 앞에 닥치면 적응 단계에서 놀라거나 낙오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후배님들께는 ‘준비’를 부탁해 봅니다. 어학(파파고로는 해결되지 않는)과 코딩, 엑셀, 포토샵등의 컴퓨터 다루는 법, 운전면허 등등 학교 다닐 때 미리 공부해 두면 더 좋을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1365 봉사 기록을 요구하는 회사들도 많습니다. 졸업이 다가왔을 때 입사지원서 양식을 보지 마시고 1, 2학년때부터 미리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온갖 항목이 다 있어 깜짝 놀라게 됩니다. 꾸준히 봉사하면서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 왔는지 살펴 보거나 개인 sns를 잘 운영하는지를 보기도 합니다(특히 네이버 같은 포털기업이나 마케팅 부서는 눈여겨봅니다.). 입사를 원하는 회사마다 체크리스트를 살펴 보시고 잘 ‘준비’해 놓길 바랍니다. 그런 후에 사회에 나오면 졸업 전 재학시절에 쌓은 모든 경험과 배움들이 유용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세계적 미래학자인 짐 데이터 교수는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한 가지 미래만을 계획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현명하지 못 한 도박이다. 어떤 미래가 펼쳐지든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내는 것이 당신의 의무이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꿈꾸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예측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내와 열정으로 차근차근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 나아가야 할 것 입니다. 저를 비롯한 10만 동문들이 상명 재학생 후배 여러분들을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고 있습니다. 2024년의 개교기념일을 맞아 함께 만들어 갈 상명의 밝은 미래를 그려 보며, 우리 총동문회의 캐치프레이즈로 인사를 마칩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비상하라 상명이여!” 제28대 총동문회장 이정현
제 733 호 [교수칼럼] 좀비와 독서
좀비와 독서 시대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괴물이 있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귀신이나 악령, 괴수가 대표적인 괴물이었다. 근대가 되면 흡혈귀나 골렘, 하이드와 같이 인격을 가진 괴물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의 경계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이었다. 21세기 들어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인상적인 괴물은 좀비이다. 좀비 영화의 원형으로 꼽히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좀비는 무덤에서 살아난 시체들이었다. 좀비는 군중과 대중사회의 공포를 표현하는 괴물이다. 그들이 자주 나타나는 공간은 쇼핑센터나 광장, 대규모 술집이나 학교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좀비가 퍼지는 이유인 바이러스 감염이나 타액 전염 역시 대중사회의 접촉 공포와 연관된다. 그들은 웬만한 상처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짐승처럼 신음 소리를 내지만 말은 하지 못한다. 고통을 느끼는 감각과 언어중추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좀비는 주체적으로 생각할 줄 모르고 오직 습관과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좀비는 미디어가 지배하는 정보사회의 인간을 상징하는 괴물이기도 하다. 정보와 지식의 양이 늘면서 인간은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누가 생산했는지 어떤 의도로 유통되는지 모르는 정보를 따라다닐 뿐 그 정보의 진위를 따지려 노력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댓글을 달거나 남의 글 퍼 옮기는 쉬운 일에 익숙해져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힘들어한다. 그들은 인터넷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접한다고 착각하지만, 대부분은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편향되고 제한된 콘텐츠를 소비할 뿐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상투적으로 반복하는 사람 역시 현실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좀비이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지켜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현대의 악은 자기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고, 자기 언어로 말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할 줄 모르는 평범한 사람 안에 있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그녀는 관료주의나 전체주의 사회 속에서 사는 인간은 쉽게 아이히만 같은 악인이 될 수 있고 말한다.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 속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투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왜 그렇지? 과연 그런가? 가치 있는 일인가?”를 계속 물어야 한다. 그래야만 남들의 사고에 지배당하는 상투성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적절한 질문을 위해서는 정보와 지식을 종합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질문한다는 것은 주체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록 질문의 답이 남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 상투적인 생각과 주체적인 사고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제 긴 ‘빌드업(Build-up)’을 마치고 결론을 말할 때다. 상투적인 인간이 되지 않는 방법, 생각을 키우고 질문을 배우는 방법에는 독서만 한 것이 없다. 책을 읽지 않는 인간은 독서하는 인간에 비해 좀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빌 게이츠는 자신에게 하버드 졸업장보다 더 소중한 것은 독서하는 습관이었다고 말한다. 독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만나고 자기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주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수단도 독서이다. 이런 이해와 사고에 기초할 때 창의력과 상상력도 나온다. 자기의 생각을 완전한 문장으로 몇 분 이상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일 것이다. 기계로 찍어낸 듯 비슷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독서는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치트키’이다. 물론 어떤 책을 읽느냐도 중요하다. 좌절감만 주는 자기계발서나 부자들의 자서전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대학생이라면 실용서보다는 교양서를 읽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인문과학책, 사회를 분석한 사회과학책, 과학을 쉽게 풀어쓴 교양 과학책 그리고 문학책을 우선 읽는 것이 좋다. 비록 책상에 앉아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독서는 매우 능동적인 활동이다. 의지가 필요한 노동이기도 하다. 정보사회에서 그저 그런 정보를 소비하는 좀비 같은 대중이 되고 싶지 않다면 당장 책을 들어야 한다. 성공을 위해서든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든 우리에게 독서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다.
이 사이트는 자바스크립트를 지원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수 있습니다.